WORKING NARM
새 책꽂이를 사 책 정리를 하던 도중, 이사하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노트를 발견했다. 노트 한 권을 다 쓰는 동안 표지가 갈라질 정도로 매일 들고 다니며 채운 노트. 다 쓰고도 버리지 못하고 곰팡이 피기 일보직전-일보앞으로- 상태가 되도록 간직하고 있었던 거야. 오랜만에 발굴한 김에 이 노트에 대한 얘기를 아카이빙한다. 진짜 곰팡이가 피기 전에..
바야흐로 900년 전... 본좌 대학 새내기 시절 첫 학기 첫 강의 시간. x같은 입시를 끝내고 나도 이제 대학생이다 이거야!! 를 외치며 강의 오티에 참석했다. 그 강의 교수님은 나긋나긋하셨고.. 나긋나긋하셨다. 아무튼 착한 인상이셨다 (실제로 훗날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2주 지각 제출했는데도 점수 잘 주셨음 (최송압니다감사합니다)). 아무튼... 그 나긋나긋한 교수님이 나긋나긋한 말투로 오티 막바지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강까지 크로키 50장 채워오세요! 기말 과제 중 하나예요 ㅎㅎ"
착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내용..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에도 50장 그리라면 그리겠는데 이것은 지금의 내가 읍리랜서의 쓴 맛을 보았고 시간이 남아도는 (과연 남아돌까요) 반백수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테다. 지금이야 어쨌든 당시에 저 교수님의 발언은 청천벽력이었음.. 새내기 본좌는 새내기라면 꼭 해야 하는 개노쓸모교양과제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기 때문에. 심지어 과제 "中" 하나. 그러나 말했듯 새내기였고 새내기 우미에겐 기말 과제를 하나라도 하지 않으면 ㅗ될 것 같단 막연한 공포감이 있었다. 그렇게 학교 앞 알파 문구점에서 워킹낢을 구매했다. 워킹낢은 기말 과제 제출용 크로키 노트였다.
...이딴 게.. 과제..?..........
여기서 알아야 할 워킹낢 구매 시점.. 6월 첫째 주였다. 한 학기 동안 하라고 낸 과제를 약 종강 2주 전부터 슬슬해볼까.(쑻) 라고.. 마음먹은 것이다. 본디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따뜻하다며 불덩이를 얹고 있다가 발가락이 타들어가면 그때서야 탭댄스를 추는 것, 그것이 나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크로키임을 감안해도 와르르 멘션이다. 당연함 내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리고 있는데 잘 그렸을 리가 없음 다 변명이지만.. 학부생 심지어 새내기는 변명해도 돼!!!
👵🖕 ㅋㅋㅋㅋ. 이 시대 최고의 힙스터셔...
잊고 살던 오라버니들의 흔적에 잠시 아득해짐..
사실 50장 못 채웠다. 절반쯤 채워서 제출했던 기억. 그치 발등에 불 얹고 있다가 발가락 타 들어가서 거의 종아리까지 잘라내는 심정으로 낸 거지. 근데 여기서 반전 하나. 학점은 의외로 잘 받았다. 3번 결석하고 중간 과제 지각 제출하고 크로키도 얼레벌레 제출했는데 무려 B+. 알고 보니 동기들은 한 장에 한두 명씩 그려 냈던 거야. 사실 이게 맞아 교수님의 의도는 그게 맞고 그냥 내가 멍청해서 제일 열심히 그린 거야.. 역시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
다음 강의 과제와 준비물 메모, 동기와 필담 나눈 것, 마켓컬리는 개짱이라는 소감 등등의 낙서. ㅁㅊ련인가 진짜.. 과제 제출용 노트를 따로 준비한 의미가 전혀 없다. 교수님 제 노트 꽤 재밌으셨겠어요..
정말 상징적인 페이지. 워킹낢 속 내용 중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다. 집에 가지 못해 진심으로 정신병 걸리기 일보직전의 상태로 보이는 10억 개의 별, 그리고 찢긴 귀퉁이로 보이는 뒷 페이지에 남겨진.. 어딘가에 갇힌 듯 집에 보내 달라는 애원, 감금당한 본좌가 사용한 펜과는 다른 펜으로 쓰인 NO.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
그 뒷 페이지. NO는 아마 내 탈주를 붙잡아주던 동기..로 추정된다. 그랬던 동기가 한 둘이 아니었어서 누군지 기억이 안 남 하하. 그러나 저 손은 신동엽 손 보고 그렸던 게 기억납니다. ㅆㅂ진짜미안하다
이 말 두상 드로잉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작화 강의 시간, <걷고 달리는 말> 작화 중에
교수님이 내 말 보고 낙타 같대서ㅜ이런시부래
문제의 말 작화
교수님.. 이거 러프였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달리는 낙타가 어딨어요
그냥 한 번 확인해 보려고 스캔 떠서 돌려보는데 옆에서 슥 보시더니 이대로 제출해도 되겠다고 하신 건 교수님이셨잖아요
저 진짜 서러웠어요 아세요?
근데 지금 보니까 말됙알이가 낙타 같긴 하네요
하......
이런 그림도 그렸었다니 놀랍군아
지금 돌이켜보면 못 그려도 열심히 그리던 시절이었다. 하루 12시간씩 그리던 정특시절보다 이쯤에 그림이 더 많이 늘었던 것 같에. 이래서 대학에 가고 돈을 내고 과제를 받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지금은 못 그리는데 열심히 그리지도 않음 하하.. 반성합니다. 이제와서 반성만 하면 어쩔건데 싶지만www. 초심을 찾긴 찾았는데 초심을.. 눈 앞에 두고 남 일 보듯 보고만 있는 저예요. 새내기 시절 그림 추팔 소감. 다들 진한 크로키를 해라. 안녕!